닥터 구의 건강칼럼 (15)
손 떨림 전에 장이 먼저 보낸다? 파킨슨병과 미주신경의 관계
첫 번째 침입 경로 — 장에서 뇌까지지난 글에서 파킨슨병이 어쩌면 뇌에서 출발하는 병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중 타격 가설'을 다뤘습니다.
변성된 알파-시뉴클린(alpha-synuclein)이 처음 생겨나는 자리가 뇌가 아니라,
몸이 바깥 세상과 맞닿는 두 지점 — 장(腸)의 신경계와 코 속 후각 신경 — 일 수 있다는 이야기였지요.
이번 글에서는 그중 첫 번째 경로, 즉 장에서 출발해 뇌로 향하는 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음식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바로 그 지점에서 변성이 시작되어, 어떤 신경 다발을 타고, 어떤 단계를 거쳐 뇌까지 올라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장 속에 숨어 있는 '작은 뇌'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장의 구조부터 짚어보겠습니다.
장은 그저 음식을 소화하고 영양분을 흡수하는 단순한 관이 아닙니다.
장벽 속에는 무려 1억 개가 넘는 신경세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척수에 존재하는 신경세포 숫자와 견줄 만한 규모입니다.
이 방대한 신경 네트워크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가 바로 장 신경계(Enteric Nervous System, ENS)이며, 흔히 '제2의 뇌'라 불립니다.
이런 별칭이 붙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장 신경계는 뇌의 지시 없이도 독자적으로 장의 움직임과 소화액 분비를 조율할 수 있습니다.
음식물이 들어오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 소화시킬지, 어느 정도의 효소를 분비할지를 장 신경계 스스로 판단합니다.
다시 말해 장은 나름의 독립적인 판단 회로를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미주신경 — 장과 뇌 사이 가장 긴 연결선장 신경계가 독립적으로 작동한다고 해서 뇌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두 신경계를 이어주는 굵직한 신경이 있는데, 바로 미주신경(Vagus nerve)입니다.
미주신경은 뇌간에서 시작해 목과 가슴을 지나 배 속 여러 장기까지 뻗어 내려가는, 인체에서 가장 긴 뇌신경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신경이 한 방향으로만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뇌에서 장으로 신호를 보내기도 하고, 반대로 장에서 뇌로 정보를 전달하기도 하는 양방향 통로입니다.
긴장했을 때 배가 아파오거나,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들 —
이 모두가 미주신경을 통한 장과 뇌 사이의 대화에서 비롯된 현상입니다.
바로 이 통로가 파킨슨병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열쇠로 등장합니다.알파-시뉴클린 변성이 장에서 시작될 수 있는 이유장은 우리 몸에서 외부 환경과 가장 폭넓게 맞닿아 있는 기관입니다.
매일 섭취하는 음식, 그 속의 미생물, 각종 독소, 농약 성분, 약물 등이 장 점막과 직접 접촉합니다.
장 점막을 모두 펼쳐 놓으면 테니스 코트 한 면 정도의 면적이 나온다는 추산이 있을 만큼, 외부 물질과 닿는 표면적이 신체 어느 부위보다도 넓습니다.
연구자들은 이렇게 넓은 접촉면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 요인들이 장 신경계 안에서 알파-시뉴클린 변성을 촉발할 수 있다고 봅니다.
특정 독소, 감염, 만성 염증, 장내 미생물 균형의 변화 등이 장 신경세포 속 알파-시뉴클린을 잘못 접히게 만드는 최초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가설의 핵심입니다.
한번 변성이 시작되면 앞선 글에서 설명한 그 과정처럼 잘못 접힌 알파-시뉴클린 단백질끼리 서로 엉겨 붙어 뭉치고,
한 신경세포에서 이웃한 신경세포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이 확산이 미주신경까지 이르면, 변성 단백질은 미주신경을 따라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서서히 뇌간 방향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동물 실험이 보여준 증거 — 쥐의 장에서 뇌까지이 가설이 단순한 추측에 그치지 않음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실험이 있습니다.
2019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연구진이 쥐의 장 속에 변성된 알파-시뉴클린을 직접 주입하는 실험을 진행했고,
그 결과를 학술지 Neuron에 발표했습니다. 실험 결과는 가설을 뒷받침했습니다.
장에 주입된 변성 단백질이 시간이 지나면서 미주신경을 타고 뇌간까지 이동하는 모습이 관찰되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이 쥐들의 뇌에서 도파민 신경세포가 손상되기 시작했고, 결국 파킨슨병과 매우 흡사한 운동 이상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미주신경을 미리 잘라둔 쥐를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했을 때는, 장에 변성 단백질을 주입해도 뇌에서 동일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즉 미주신경이라는 통로가 막히면 변성 단백질이 뇌까지 다다르지 못한다는 사실도 함께 확인된 셈입니다.
이 실험은 동물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가설의 핵심 메커니즘 — 장에서 시작 → 미주신경을 타고 이동 → 뇌 속 도파민 신경세포 손상 —
이 실제 분자·세포 수준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서 나온 단서 — 미주신경 절단술 이후의 추적 연구쥐 실험이 메커니즘 자체를 보여줬다면, 사람을 대상으로 한 흥미로운 단서도 있습니다.
20세기 중반 무렵, 일부 위궤양 환자들은 치료 목적으로 미주신경 절단술을 받았습니다.
위산 분비를 줄이기 위해 미주신경 일부를 외과적으로 절단하는 시술이었습니다.
(요즘은 효과적인 약물 치료가 발달하면서 이 시술이 거의 자취를 감췄습니다.)
수십 년이 흐른 뒤, 연구자들은 이 시술을 받았던 환자들이 이후 파킨슨병에 걸린 비율을 일반인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2015년 발표된 덴마크 코호트 연구에 따르면, 미주신경 줄기 전체를 절단한 환자들의 경우 20년 이상 장기 추적 결과 파킨슨병 발생률이 일반인보다 뚜렷하게 낮았습니다.
장에서 뇌로 이어지는 통로인 미주신경이 수십 년 전에 끊어졌던 사람들에게서 훗날 파킨슨병 위험이 낮아졌다는 이 신호는,
앞선 가설을 사람 차원에서 간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자료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역학 연구 결과는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주신경 절단이 파킨슨병을 예방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가설을 보강하는 간접적 단서 정도로 이해하시는 것이 맞습니다.)이 경로 하나가 말해주는 것장 신경계에서 시작된 알파-시뉴클린 변성이 미주신경을 타고 이동해 결국 흑색질 도파민 신경세포까지 손상시킨다는 이 흐름이 사실이라면,
파킨슨병 환자의 몸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운동 증상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진행 중이었다는 뜻이 됩니다.
변성이 아직 장 신경계 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겉으로 아무런 운동 증상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변성이 미주신경을 거쳐 뇌간을 지나 마침내 흑색질의 도파민 신경세포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떨림이나 경직된 자세와 같은 운동 증상이 처음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사이에 걸리는 시간은 짧으면 몇 년, 길면 수십 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추정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동 중'에 해당하는 수년에서 수십 년 사이, 환자의 몸에는 그보다 먼저 나타나는 신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신호들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글들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마치며지금까지 장에서 뇌까지 이어지는 한 경로를 살펴봤습니다.
다만 이중 타격 가설에서 말하는 침입 경로는 이 한 곳만이 아닙니다.
또 다른 하나는 몸의 또 다른 변방 — 코 속 후각 신경 — 에서 출발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두 번째 경로를 따라가 보겠습니다.참고자료1차 사료
Kim S, Kwon SH, Kam TI, et al. Transneuronal propagation of pathologic α-synuclein from the gut to the brain models Parkinson's disease. Neuron. 2019;103(4):627-641. (2019 Johns Hopkins 쥐 실험)
Svensson E, Horváth-Puhó E, Thomsen RW, et al. Vagotomy and subsequent risk of Parkinson's disease. Ann Neurol. 2015;78(4):522-529. (덴마크 미주신경 절단 코호트 연구)
Braak H, de Vos RA, Bohl J, Del Tredici K. Gastric alpha-synuclein immunoreactive inclusions in Meissner's and Auerbach's plexuses in cases staged for Parkinson's disease-related brain pathology. Neurosci Lett. 2006;396(1):67-72. (장 신경총에서 알파-시뉴클린 직접 관찰)
학술 2차 문헌
Furness JB. The enteric nervous system and neurogastroenterology. Nat Rev Gastroenterol Hepatol. 2012;9(5):286-294.
Berthoud HR, Neuhuber WL. Functional and chemical anatomy of the afferent vagal system. Auton Neurosci. 2000;85(1-3):1-17.